이야기

반야심경해설

은오 2007. 7. 9. 13:26
 

原文 (원문)

摩 (마) 訶 (가) 般 (반) 若 (야) 坡 (파) 羅 (라) 蜜 (밀) 多 (다) 心 (심) 經 (경)

觀 (관) 自 (자) 在 (재) 菩 (보) 薩 (살) 行 (행) 深 (심) 般 (반) 若 (야) 坡 (파) 羅 (라) 蜜 (밀) 多 (다) 時 (시) 照 (조) 見 (견) 五 (오) 蘊 (온) 皆 (개) 空 (공)

度 (도) 一 (일) 切 (체) 苦 (고) 厄 (액) 舍 (사) 利 (리) 子 (자) 色 (색) 不 (불) 異 (이) 空 (공) 空 (공) 不 (불) 異 (이) 色 (색) 色 (색) 卽 (즉) 是 (시) 空 (공)

空 (공) 卽 (즉) 是 (시) 色 (색) 受 (수) 想 (상) 行 (행) 識 (식) 亦 (역) 復 (부) 如 (여) 是 (시) 舍 (사) 利 (이) 子 (자) 是 (시) 諸 (제) 法 (법) 空 (공) 相 (상)

不 (불) 生 (생) 不 (불) 滅 (멸) 不 (불) 垢 (구) 不 (부) 淨 (정) 不 (부) 增 (증) 不 (불) 減 (감) 是 (시) 故 (고) 空 (공) 中 (중) 無 (무)

色 (색) 無 (무) 受 (수)

想 (상) 行 (행) 識 (식) 無 (무) 眼 (안) 耳 (이) 鼻 (비) 舌 (설) 身 (신) 意 (의) 無 (무) 色 (색) 聲 (성) 香 (향) 味 (미) 觸 (촉) 法 (법) 無 (무) 眼 (안) 界 (계)

乃 (내) 至 (지) 無 (무) 意 (의) 識 (식) 界 (계) 無 (무) 無 (무) 明 (명) 亦 (역) 無 (무) 無 (무) 明 (명) 盡 (진) 乃 (내) 至 (지) 無 (무) 老 (노) 死 (사) 亦 (역)

無 (무) 老 (노) 死 (사) 盡 (진) 無 (무) 苦 (고) 集 (집) 滅 (멸) 道 (도) 無 (무) 智 (지) 役 (역) 無 (무) 得 (득) 以 (이) 無 (무) 所 (소) 得 (득) 故 (고) 菩 (보)

                                                                              

堤 (제) 薩 (살) 埵 (타) 依 (의) 般 (반) 若 (야) 波 (파) 羅 (라) 蜜 (밀) 多 (다) 故 (고) 心 (심) 無 (무) 罣 (괘) 碍 (애) 無 (무) 罣 (괘) 碍 (애) 故 (고) 無 (무)

有 (유) 恐 (공) 佈 (포) 遠 (원) 離 (리) 顚 (전) 倒 (도) 夢 (몽) 想 (상) 究 (구) 竟 (경) 涅 (열) 槃 (반) 三 (삼) 世 (세) 諸 (제) 佛 (불) 依 (의) 般 (반) 若 (야)

                                                                                              

波 (파) 羅 (라) 蜜 (밀) 多 (다) 故 (고) 得 (득) 阿 (아) 褥 (욕) 多 (다) 羅 (라) 三 (삼) 藐 (막) 三 (삼) 菩 (보) 提 (제) 故 (고) 知 (지) 般 (반) 若 (야) 波 (파)

羅 (라) 蜜 (밀) 多 (다) 是 (시) 大 (대) 神 (신) 呪 (주) 是 (시) 大 (대) 明 (명) 呪 (주) 是 (시) 無 (무) 上 (상) 呪 (주) 是 (시) 無 (무) 等 (등) 等 (등) 呪 (주)

                                                             

能 (능) 除 (제) 一 (일) 切 (체) 苦 (고) 眞 (진) 實 (실) 不 (불) 虛 (허) 故 (고) 說 (설) 般 (반) 若 (야) 波 (파) 羅 (라) 蜜 (밀) 多 (다) 呪 (주) 卽 (즉) 說 (설)                      

呪 (주) 曰 (왈) 揭 (게) 帝 (제) 揭 (게) 帝 (제) 波 (파) 羅 (라) 揭 (게) 帝 (제) 波 (파) 羅 (라) 僧 (승) 揭 (게) 帝 (제) 菩 (보) 提 (제) 娑 (사) 婆 (파) 訶  

  

종교(宗敎) 

종교를 논하기 전에 먼저 인간도 특별한 존재가 아니고 대자연에서 탄생되어

진화된 생명의 현상(現象)이라는 것을 알고 또 확실하게 인정해야 대화(對話)가 된다.

인간이 특별하지 않은 것은 19세기 이후 과학적 연구 자료 또 고고학 자료가 입정(立定) 하고 있다 그것을 부정하는 것은 형이상학(形而上學)관념론에 빠진 망상(妄想)이다.

그럼 종교는 언제 어떻게 생겨났는가를 생각해보면 많은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인간(人間)도 처음에는 지금 우리가 보는 저속한 동물과 별 차이점이 없어다는 것이

입정되었다. 그럼 왜 종교가 생겼을까?

그것은 자연환경과 삶에 많은 관계가 있었을 것이다.

인간이 자연을 극복하지 못하고, 자연에 비해 나약하고

또한 약육강식(弱肉强食)적자생존(適者生存)의 법칙에서 살아가기

위해 불안과 공포로 초조했을 것이다.

 

그 공포에서 위무(慰撫)받고 안심(安心)의 방편으로 먼저 의식(意識)이 진화(進化)된

인간이 자신(自身)이 살아가는 방편으로 종교가 처음으로 시작된 것일 수가 있다.

그럼으로 종교는 인간이 공포와 불안 이라는 의식이 발생하고부터 시작된 것이다.

지금의 종교인들은 옛 의식이 낮은 우리의 선조가 믿은 종교는 미신이고 잘못된 것이라고 하고 2500년 2000년 전의 자기들 종교는 미신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무슨 이유 일까?

그런 현상은 종교도 그 시대와 의식에 따라 진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21세기에 종교는 2000년 전에 원시종교를 미신이라고 한 것과 같이

형이상학(形而上學) 관념론적 종교는 미신(迷信)이며 기만(欺瞞)이다.

그리고 자신들의 삶에 목적이지 대중과 같이 사는 것이 아니다.

 

종교지도자나  종교를 맹신하는 이들의 내면은 철저하게 이기(利己)적이고,

객관(客觀)보편적이지 못하고 포장한 집단주관(主觀)적이며 각각의 개인은

자신(自信)도 모르고 맹신(盲信)이며 더 나아가서 광신(狂信)이 되어 있는 것이다.

빨리 현실을 직시(直視)하고 미래(未來)의 후손 위해 내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삶의 목적과 이유를 알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보람을 찾는 것이다.

종교가 인류에 끼친 영향은 현실에 눈을 뜨지 못하게 하고 순종과 복종에 길들였다.

인류의 최고 악행자(惡行者)는 크고 작은 관념적인 신앙을 만든 교주들 일 것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진리의 불교는 종교가 아니고 철학이다.

철학은 인간학이며 인간학은 사회학으로 사회학은 정치학으로 바른 정치는

인간의 행복을 추구하지만 잘못된 정치는 대중을 속이고

그 속이는 자양분 역할은 종교가 한다는 것을 말할 수 있다. 

즉 철학은 종교와 대립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즉 부처는 종교와 대립이다.

결과적으로 불교는 현실을 직시하는 철학이다.**

                                                                           

                                                                                                  

앞 선 글

먼저 “반야심경”을 해의(解義)하기에 앞서 반야심경은 8만대장경 3부중에서 반야부이고 반야부는 21경 736편으로써 글자 수는 260만자로 설하신 것을 중국의 당나라 때 현장스님이 경명 10자 본경 260자로 압축하여 지금 우리가 많이 게송 하는

“마가반야밀다심경”이다. 

 

그리고 현장스님께서도 석가모니 부처님이 전지전능하고 불가사의 형이상학적 관념적인 신(神)이 아니고 전 인류를 바르고 사람답게 살아가는 이치를 깨우쳐 주시는

진리의 스승이고 고통 받는 절대다수의 대중을 보신 위대한 현자(賢者)이시며

부처님의 진정한 뜻은 대중(大衆)을 기준하여 제도(制度)하고 구제(救濟)하심에 있다는 것을 알고, 그리고 부처님의 진정한 진리도 시대의 변화에 맞게 해석하고

대중을 제도하고 과학의 시대에 맞는 해석으로 부처님의 뜻을 전도하는 것이

참다운 부처님의 제자이다

 

과거 군주시대에 확인 할 수 없는 형이상학적 관념으로

무지한 대중을 다스리는 방법으로 해석한 것을 지금도 집단의 이익과

개인의 영리(營利)목적으로 대중을 속이는 것은 부처님의 뜻도 아니고 부처님의 제자가 아니고 오히려 부처님을 모욕하는 사이비 제자들이라는 것을 재가 불자나 공부 하시는 분들은 알고, 그러한 자들의 사술(詐術)이나 요술(妖術)에 속지 말길 바라면서

참다운 부처님의 진리와 의미를 해의(解義)하고자 한다. 즉 불교는 정신적 철학이고

이 정신적 철학이 바로 알려지고서야 현실적 철학은 확인되고 실천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불교는 기복(祈福)의 종교가 아니고 진리를 찾는 정신적 철학이다.


첫째, 불교는 다른 종교와는 다르게 교주(敎主)나 경전을 무조건으로 믿는 종교가 아니고 공부하는 종교이다.

당신께서도 항상 공부(정진)를 중히 여기셨고, 이후 대득 선사들께서도 같은 말을 하셨다. 즉 불교는 관념으로 믿고 따라가는 것이 아니고 알려고 해야 하며,

알려면 공부를 하여야 하고 알아야 속지 않고 진정한 부처님의 뜻을행동으로실천할 수가 있다.

 

그 실천이 보살행(菩薩行)이 되고 우리가 같이 어울려 사는 이 사회가 부처께서 말씀하시는 불국토(佛國土)를 이루고 도솔천이 될 수가 있다.


둘째, 불교는 멀리서 바라보면 너무나 어렵고 일반 대중께서는 접하는 것을 꺼려하시는데 불교를 가까이서 바로보고 공부하면 너무나 쉬운 밝은 이치의 공부이다.


즉, 불교는 다른 종교와 달리 강요(綱要)하지를 않고 환경과 조건에 반영(反映)하여

자발적으로 마음이 일어나고 행동하길 바라는 종교이다,

근래에 와서 부처님의 뜻과 다른 행동을 하는 사이비 제자들이 판을 치는 것은 일반 대중이 공부를 하지 않고 맹신(盲信)하고 부처의 근본을 모르기 때문에 속고 속이고 있는 것이다.


셋째, 불교는 원래 밝은 이치를 공부하여 실천하는 종교이지 기복적(祈福的)으로

타력(他力)으로 요행을 바라는 종교가 아니라는 것이다  오로지 자기를 깨쳐 행동으로 보여주고 대중을 기준하여 현실을 직시하고 분별하는 종교라는 것이다


이와같이 참 이치의 불교를 잘 알고 부처님의 뜻을 따르는데 다 같이 하나의 밀알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만족하지는 못해도 최선의 노력으로 해의(解義) 하려 한다,


불교의 핵심은 경전이다. 불교의 경전은 너무나 광대하기에 일반 대중은 접하길 꺼려하고 접하여도 비유론(比喩論)과 어려운 한문으로 되어 있어 책만 펼쳐도 정신이 혼미(昏迷)하다.

그리고 서점에 일부 선사들이 풀이해서 책으로 엮어서 세상에 내놓은 것들은 자신들이 산속에서 공부했다고 하는 것을 무엇인 냥! 주관(主觀)관념론(觀念論)으로 호들갑떨면서 대중하고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것을 도인이니 깨달은 자라고 자기의 환상적 정신을 일반 대중한테 강요 아닌 강요를 하고 있다.

 

자기들 생각대로 하자면 우리 모두가 산속에서 도나 닦고 중이 되어 자기들 같이 무위도식(無爲徒食) 하길 바라는 소리인지 무슨 말인지 머리도 꼬리도 없이 두루 뭉실 얼렁뚱땅 구렁이 담 넘어가는 소리만 하면서 대중의 감정을 유혹하여 자신들의 부(富)를 쌓는 수단으로 부처님의 경전을 형이상학적이고 집단관념과 주관 관념으로 호도(糊陶)하고 있지 않은가 가면을 벗기고 내면을 보라!


우리는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49년 동안 하루도 쉬지 않으시고 설법(說法)해 주신

무진법문(無盡法門)을 흔히 8만4천 법문이라고 일컫고 이 8만 4천 법문을 실은

수많은 경전(經典)들을 통틀어 말할 때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이라 한다.

유네스코에 등록된 세계적 자랑거리인 합천 해인사(海印寺)의 팔만대장경도

다름 아닌 부처님의 일대(一代)의 교법(敎法)을 담은 경판(經板)인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광대무변(廣大無邊)한 부처님의 교법을 일반 대중이 전부 알아야

극락(불국토)과 마음의 평화 그리고 악연(惡緣)을 벗어날 수 있다면 잘못 되어도

한참을 잘못된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이것은 애초부터 계획적으로 석가모니 부처님은 대중을 혼란 속에

빠트려 자신의 안위(安慰)에 목적이 있었다고 보아도 아무 하자(瑕疵)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설법은 부처의 설법이 아니고 욕심 많은 교주(敎主)의 요술(妖術)이고

사술(私術)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예를 들어 이 시대에 당신께서 오신다면 작금(昨今)에 벌어지는 당신의 설법을

오히려 개탄(慨嘆)하고 통곡(慟哭)하며 설법을 거두고 싶으실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거 하셨다!

이 광대무변한 설법을 너무나 간단하고 명료(明瞭)하게 말씀하셨으니

이 얼마나 희열(喜悅)에 찬 마음이라 아니 할 수 있겠는가? 

그것이 바로 “반야심경(般若心經)”이다

그리하여 일반 대중은 이 반야심경의 의미를 터득하여 불교와 부처님을 바르게 알고

실천하는 것이 진정한 부처님이고 보살행일 것이다.


여기서 꼭 이야기 하고자 하는 것은 석가모니 부처님 시대의 환경과 조건을 음미하고 인간의 역사를 되새겨 보면서 부처님을 생각하고 작금(昨今)에 중(仲)들의 잘못된 행동은 우리 대중이 모르고 공부를 하지 않기에 속고 있다는 사실과 위대한 부처님의 설법을 자기들 집단과 개인의 안위에 목적을 두고 맹신(盲信)자로 만들어

현실 세계를 보지 못하게 하고 있다는 것을 꼭 알아야 할 것이다.


위의 첫 장에 반야심경 원문과 한문 음미하면서 우리같이 풀어 보기로 하자.

반야심경은 경명(經名)이 10자 그리고 본문(本文)이 260자로 이루어지고

260자 중에서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것이 (空)자와 (不)자 그리고 (無)자를

깊이 음미하고 기억(記憶)해야 한다.

(空)자는 7(不)자는 9번을 그리고 (無)자는 심지어 21번을 설(說)하는 것은!,,,,,,,,


그리고 본문에서 제일 첫머리에 관자재보살 하면서 시작하고 있다.

이것이 제일 중요한 의미로 부처님께서 설하셨다!

이것은 내가 살아야<존재>하고 살아야만 이루어 낼 수가 있다는 모든 현실의 핵심이다


즉, 관자재(觀自在) 는 서서로 나를 갖추는 것이고 갖추어지면 이 몸 또한 대자연의 물질에 포함되어 있는  물질이라는 이치로 보는 것이 부처의 경지라고 알려주려고 하는 것이 “반야심경”의 첫 “관자재”의 의미이다. 또한 자신이 갖추지 못하면 대자연의 이치를 깨달치 못한다는 함축(含蓄)된 아주 중요한 것이다.

 

갖춤은 검소하고 절약으로 의식주(衣食住)가 기본이다.

그것은 어떠한 환경과 조건 속에서도 살아서 분별력를 갖추어 극복하여 이루어

내어야.......


공, 불, 무. 풀이

(空)은 담은 그릇은 있되 속은 비었다. 또는 없다는 뜻이고!......

    (나의 삶은 우리 속에 있다)

(不)은 담은 그릇마저도 없어졌다는 뜻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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