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 조차도 반으로 나뉜 것이라면
세상에 완전한 것은 없는 셈이다
조물주가 그렇게 만든 것인지
원래 그렇게 발생돼 왔는지 모르지만
세상에 완전한 것은 없으며
있을 수도 없다
밤은 낮이 있어야 하며
슬픔은 행복으로 만들고
행복은 슬픔으로 만드는 것을...
백색조차도
검정색이 있어야 알 수 있는 것...
하루종일 굶었을 땐
이곳 피시방에서 주는 음료수가 놀랍게도 맛있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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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우리는 그나마 좋은 사람들끼리도
가까워져 서로의 흠만을 본다
잘 떠오르진 않지만
보다 완전한 것을 찾으려는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으로
초록은 동색이라든가 오십보 백보라는 말외에도
무슨 말이 있었던 것 같다.
백색이 둔하다 하여
사악한 검정을 택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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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어떤 사람이 사위감을 고른데 너무 까다롭게 고르다가 딸의 혼기를 넘겨 과년(過年) 시키고 말았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여전히 고르고만 있었고 당사자인 처녀는 날이갈수록 초조할 수밖에 없었다,
가문이 쓸만하면 인물이 빠지고, 인물이 좋으면 가문이 신통치 않으며 학문이 좋다고 하면 재산이 없고,
재산이 좀 어지간하면 학문이 얕아 이것 저것 모두 갖춰진 사람을 찾으려고 하니 쉽게 마땅한 사위감이 눈에 띄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날 그날도 사위감을 찾아 나서려 할 때였다. 되시락을 싸가지고 문간에서 배웅하던 딸이 말하기를
"아버님 오늘 드리는 도시락은 아무데서나 그냥 잡수시지 마시고 산 좋고 물 좋고 정자 좋은 곳에서 꼭 잡수셔야해요"
했다.
딸의 당부말을 무심히 넘기고 여기 저길 돌아다니다가 사장기가 들어 도시락 뚜껑을 열다가 아침에 들었던 딸에 말이 생각나 주위를 둘러보니
산은 좋은데 물이 깨끗치 못하고 정자도 그리 깨끗치 못했다. 다시 물 좋은 곳을 찾아가 보니 산이 보이지 않고 정자 좋은곳을 찾아가 보니 물이 좋지 않았다.
이렇게 여기 저기 찾아 해매다가 석양이 되고 말았다.
그때서야 그 아버지는 딸의 속 맘을 깨닫고 집에 돌아와서는 바로 웬만한 자리로 딸을 시집보냈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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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남자가 죽어서 지옥에 떨어졌다. 그런데 그의 저승사자의 실수로 잘못 끌 려온 것으로 판명되었다. 염라대왕은 그를 다시 속세에 환생시키고자 했다. 그러자 그가 이렇게 말했다.
"저는 인간 세계로 가기 싫습니다. 하지만 대왕께서 제가 바라는 조건을 들어주신다면 명을 따르겠습니다." 염라대왕이 물었다. "그 조건이란 대체 무엇인가?"
그러자 그 남자가 대답했다. "이번엔 제가 인간으로 환생한다면 장관의 아들이나 장원급제한 아들을 가진 아버지로 태어나게 해 주십시오.
그리고 넓은 땅과 연못, 온갖 과일이 열리는 과수원과 아름답고 상냥한 아내, 어여쁜 첩들이 있어야 합니다. 또 온갖 보물과 곡물이 가득한 창고를 주시고, 마침내 제가 제왕이 되도록 해 주십시오.
그리고 백살까지 살게 해 주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저는 환생하지 않겠습니다." 이 말을 들은 염라대왕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이 친구야, 속세에 그런 부귀영화가 있다면 차라리 내가 환생하고 말겠다. 어찌 너에게 그런 복을 준단 말이냐?" 중국인들의 세계관은 이 우화에서 말하듯 불완전한 모습을 가지고 있다. 인간 사회는 이런 불완전을 개선하려 하지만 거의 불가능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애초부터 완전한 평화나 완전한 행복 따위는 바라지 않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들의 삶은 '적당히 하자' 하는 한마디로 요약된다. 즉 무슨 일이든지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지도 말고 너무 적게 기대하지도 말라는 것이다.
인간은 모두가 어떤 번뇌와 욕망 그리고 활력을 가지고 인생을 출발한다. 그것은 유년과 장년, 노년을 통하여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나타난다. 스승 공자는 그런 삶의 다양함을 걱정하며 이렇게 가르쳤다.
"젊었을 때는 여색을 경계해야 하고, 장년에는 다툼을 경계해야 하며, 노년에는 이득을 경계해야 한다." 이 말은 곧 청년은 이성을 사랑하고, 장년은 투쟁을 사랑하며, 노년을 돈을 사랑한다는 뜻에 다름 아닐 것이다.
욕망과 절제, 이것은 중국인들의 삶의 근본적인 것이었다. 말하자면 인간은 하늘과 땅, 이상주위와 현실주위, 숭고한 사상과 비천한 번뇌 사이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지식에도 갈증을 느끼지만 물에도 갈증을 느낀다. 훌륭한 사상도 좋지 만 한 접시의 맛있는 돼지고기도 좋다. 여색을 경계하는 글도 가치 있지만 미인 도 버리기 아깝다.
이러한 중용적 태도에서 관대한 중국인들의 철학이 탄생되었다. 그들은 법률적이든 도덕적이든 정치적이든 간에 정상적인 인간의 번뇌의 부류에 속하는 인간적 과실이나 품행은 용서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에 비하여 하늘, 즉 신은 말이 통하는 존재라고 여겼다. 인간은 자신이 최선이라고 믿는 바에 따라 중용적 생활을 한다면 두려워할 것이 없고, 양심의 평안이라는 최대의 보람을 느낄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이 맑은 사람은 귀신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들의 신은 중용적인 신이기 때문이다. 폭군은 죽고 반역자는 자살하며, 탐욕으로 모은 재산은 남의 손에 넘어가기 마련이다. 살인자는 죽음을 당하고, 용을 당한 여인은 다른 사람이 원수를 갚아주게 되어 있다. 그들은 자연을 이해한다. 그것은 어떤 중국 여인의 다음과 같은 말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누군가 우리를 낳았고, 우리는 누군가를 낳는다. 그밖에 또 무엇이 있단 말입니까?"
이 말을 무서운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와 같은 결론은 결국 인간이 생물에 불과하며, 불멸론 따위는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손자의 손을 잡고 걸어가는 할아버지는 이렇게 말한다.
"5년이나 10년 뒤에 나는 땅 속으로 들어간단다. 우리 조상님 곁으로 말이야. 너와는 언젠가는 만나게 될 것이다."
때문에 중국인들은 이 세상에 살면서 최상의 행복이란 망신스런 자식이나 손자를 두지 않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곧 그들이 사는 법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