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원에 사는 선비 박인묵(朴仁默)은 집이 가난했지만 늙은 부모를 극진히 봉양했다.
박인묵이 갑진년(정종 8년) 단오날에 몇 사람과 같이 지리산에 약초를 캐러 갔다. 그는 약초 캐는데 정신이 쏠려 일행과 서로 헤어져 산속 깊이 들어갔기로 방향을 잃었고, 또 구름과 안개에 뒤덮여 지척을 분간 할 수 없었다.
박씨는 그제야 크게 놀라 오늘 저녁을 어떻게 넘길까 걱정하던 차에 갑자기 바위 구멍에서 두아이가 등불을 들고 나와서 박씨에게 공손히 예를 하고는
「스승님의 분부로 손님을 맞으러 왔습니다.」하였다.
그들을 따라가니 종죽으로 둘러 싸인 두어 칸 초가집에 등불이 휘황한데 한 노인이 갈건포의(葛巾布衣)로 손에 깃부채를 들고 앉았다가 일어나「귀한 손님이 오시는데 이 늙은이가 산 아래에 내려가 맞이 하지 못하여 죄송합니다.」하였다.
박인묵이
「저 산 밑에 살고 있으면서도 여기에 이러한 선가(仙家)가 있는지 몰랐습니다. 저에게 많은 가르치심을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선사의 성명은 뉘신지요.」
「나처럼 세상을 떠나 사는 사람이 속세에 계신 분과 성명을 말해서 무엇하겠소. 그저 산수가 아름다운 곳에 잠깐 머물렀다 가는 정처 없는 사람이지요」
박씨가 사방 벽을 살펴보니 거기에는 자연과 더불어 사는 운치와 심정을 읊은 절구가 몇 수 붙어 있고, 책상에는 주역(周易)과 유리병, 공작의 꼬리깃 하나가 있고, 그밖에는 거문고와 향로 뿐이었다.
노인은 동자에게 차를 올리라 하여 같이 마시고는 박씨에게 부탁하기를 「내가 속세를 떠나 여기서 산짐승과 학거문고를 벗 삼아 살며 꽃이 피면 봄인가보다. 낙엽이 지면 가을인가보다. 하고 기약없이 사는 것은 내게 오직 하나 딸이 있어 그 성혼(成婚)이나 보고 싶었던 것인데 이제 혼기가 되었고, 그 자질이 남편을 받들만하니 일시 그대의 아내를 삼으면 좋겠다고 여겨져 초청한 것일세」
하였다.박씨가 그말을 듣고 놀라면서
「저는 집이 가난하고, 늙은 부모가 계시며, 아내와 아들이 있으니, 어찌 두 아내를 거느릴 수가 있겠습니까, 실로 명령에 따를 자격이 없습니다」하고 엎드려 사양했다. 노인이 크게 노하여
「늙은이가 좋은 뜻에서 권하거늘 그대가 어찌 거역하는가, 만일 끝까지 내말을 듣지 않는다면 그대를 여기서 보내 주지 않을 것이네」
하므로 박씨는 할 수 없이 그에 따랐다.
노인은 기뻐하며 박씨를 내당으로 안내했다. 방도 화려하고 음식도 진수성찬이 준비되어 있었다. 조금 있으니 향기가 일고 비단 장막이 움직이더니 한 여인이 병풍 뒤에서 나오는데 처음 보는 천하절색이었다.
박씨가 그 미녀와 서로 절을 하고 나니 노인은 곤한데 어서 누으라며 나가버렸다. 박씨가 미녀와 사흘 동안을 같이 지내면서 여러 가지 일을 물었으나 미녀는 일체 대답이 없어 그 정체를 알 수 없었다.
사흘 후 노인이 술자리를 베풀고 이르기를
「그대의 집안이 장차 현달(顯達)할 것이니 이제는 돌아가오」
하고 인삼, 계지(桂枝), 호박(琥珀), 마노(瑪瑙), 산호 등을 주며
「물건은 하찮지만 정표로 주는 것이니 받아 두오」
하였다. 박씨가 치사하고
「또 다시 만날 날이 있겠습니까」
하니 노인이
「다음 을사년 삼월 삼일에 내가 경성(京城), 동문(東門), 종암(鍾岩)에 말을 타고 갈것이니 그때 만나세」
하여 울며 헤어졌다. 박씨가 몇걸음 걷다 돌아보니 이제까지 있었던 초가집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고 송죽만 우거진 속에 새소리만 구슬펐다. 박씨는 집으로 돌아와 노인이 준 물건을 팔아 큰 부자가 되었다.
그 후 박씨는 노인이 만나자는 기일에 사흘 앞서 경성으로 올라가 술과 좋은 안주를 많이 준비하고 그날 그 장소에서 저물도록 기다렸다.
그러나 노인이 끝내 나타나지 않아서 한탄하고 있던 중 마침내 말탄 사람이 이편으로 오는지라 크게 기뻐했더니 만나 보니 전연 모르는 사람이었다.
박씨가 크게 낙심하고 집으로 돌아갈까 하다가 문득 생각하니 이미 장만해 온 음식이 많으니 이 사람과 한잔 나누는 것도 무방한 일이라고 여겨져 그 손님에게 인사를 하고
「우리가 이렇게 만나게 된 것도 하나의 인연이니 술이나 한잔 나눕시다」
하고 그를 초대하여 자리를 마련했다. 그 손님은 뜻밖에 큰 대접을 받고 이상하게 여겨 그 연유를 물었다.
박씨는 지리산 사건을 상세히 이야기 했다. 손님이 그 말을 듣고 감탄을 마지 않으며
「선생께서는 '천을(天乙)'의 일을 겪었군요」
하였다. 박씨가,
「'천을' 이란 무엇입니까」 물었다.
「'천을'이란 새의 이름입니다.이 새는 반드시 명산에만 있지요. '천을'은 하늘의 새, 신령스러운 새라는 뜻이지요, 그 천을은 새끼를 까려면 반드시 사람으로 화신해서 교접합니다. 선생께서는 천을과 일시 인연을 맺었던 것입니다」
하였다. 먼저 노인이 박씨에게 경성에서 만나자는 말은 이 손님의 말로써 박씨로 하여금 사건을 깨닫게 하려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