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쏘기

정간(퍼옴)

은오 2006. 9. 8. 17:22

이 글은 대한 궁도협회 부회장 남도순님께서 2005년도 국궁지도자 강습회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 정간론 *

 

一 서론

 

정간이 무엇이며 활터에 언제부터 정간이 있었는가 활을 쏘는 모든 궁사들이 정확한 뜻을 알고자 하는것이 숙제였으나 어디에도 그 정확한 설명이 없었다.

향사례(鄕射禮) 대사례( 大射禮) 등을 수록한 신숙주(申叔舟)가 저술한 국조오례서례(國朝五禮序禮), 예기(禮記) 등 어떠한 고서에서도 찾아 볼 수 없고 조선조 숙종때 간행된 사법비전(射法秘傳), 궁술에 대하여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기술한 조선의 궁술(1929년간)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

다만 조선의 궁술을 모체로 하여 간행된 "한국의 궁도"에서 그 기원은 확실치 않으나 지역에 따라 전해져 오는 몇가지 설(說)을 소개하고 있을 따름이다.

 

1. 호남설

정(正)은 활을 쏘는 사람이 진퇴주선(進退周旋: 나아가고 물러서 몸을 돌리는 몸가짐을 말함) 할때 뜻을 바로 하고 내지정(內志定) 밖으로는 몸을 바르게 외체면(外體面) 한 연후에 집궁하여 활을 쏠때 매우 굳건(審固)함으로서 발시 하는 자세를 완전히 갖추는 것이다.

간(間)이라는 것은 천지도 한번 움직이고 한번 정지하는 순간(一動一靜之間)이 있고 우리 인간도 一動一靜之間이 있으니 이를 천지합치(天地合致)라고 한다. 그러니 일동일정(一動一靜)은 활을 쏘면 반드시 적중(發而必中) 하는 일순지간(一瞬之間)이다. 이와 같은 이유로 정간배례를 함은 발이필중을 기원하는것이다. 라고 풀이하고 있다.

그러나 이글은 예기(禮記) 사의편(射義編)과 악기(樂記) 편에 언급된 사(射)와 악(樂)에 대한 뜻을 정간에다 짜 맞추어 풀어 놓은것에 불과하다.

 

 

2. 영남설

이 영남설은 만물의 영장인 인간을 평간(平間)이라 하고 인간을 초월한 존재 즉 신(神)을 정간이 라고 풀이하면서 평간인 인간이 신인 정간을 향하여 배례하는 것은 인간은 심약하고 무절제한 존재이니 인간 이상의  힘에 의존 하고자 하는 본능 때문에 인간은 이를 통하여 지기의 인격완성을 추구해 나긴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 설도 정간을 신이라고 풀이하고 있으나 정간이란 한 건물의 중심간으로 상위개념의 윗자리인 존엄처(尊嚴處)이지 신이라고 할 수는 없으며 인간을 평간이라 한 것도 그 뜻이 모호할 뿐만 아니라 정간에 관한 확실한 설명이라 할 수 없다.

 

 

3. 서울설

정간은 정자(亭子)의 한 가운데 있는 간(間)을 말하는 것으로 조선시대 무과시를 치룰때 전관(銓官: 시험관)앉아 있던 자리이고 민간 사정에서는 사두가 앉던 자리인데 무과시를  치룰 때 전관에게 절을 하고 민간 사정에서는 등정하여 사두에게 절을 하고 인사를 하던것이  오늘날과 같이 변천되었다고 한다.

이설 역시 확실한 설명이 되지 않는다. 정간이 사정의 한 가운데에 있는 간(間)임에는 틀림없으나 무과시 때 전관이 앉던 자리라는 것도 확실치 않고 민간 사정에 사두의 자리에다 절을 하였다는 것도 믿기 어렵다.

 

 

4. 강원설

이 강원설은 퇴계 이황의 태극도설에다 정간을 결부시켜 놓았다.

정간이란 무극(無極)음양, 유강, 인의 와 같은 뜻으로 궁도인을 인극(人極)이라하고 연극을 형상화 하고 그림으로 나타낸것이 태극기(太極旗)이고 이것을 글로 옮겨 놓은것이 정간이다.

 

정간은 글자 그대로 바를 정(정)사이 간이다.  즉 바른 사이이다. 바른 사이란 무엇인가 하면 사이에 (間) 도(道)가 있다고 말 하고 있다.

부부지간의 도는 별이며 장유지간의 도는 서이며 붕우지간의 도는 신이 되는것이다.

인간이 인간을 대 할때나 만사 만물을 대할때 인의예지신(義禮智信)으로 대하면 정간이 된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상에서 보는 바와 같이 각 지역마다 자기 나름대로 좋은 말과 좋은 글귀를 모아 형이 상학적인 평상을 초월한 상상력으로 유식한 정의를 내리고 있으나 이러한 유식한 해설이 정간이라는 개념을 더욱 어렵고 복잡하게 만들고 말았다.

 

 

二 정간이 무엇이며 언제부터 존재 하였는가.

 

이 대답은 너무나도 간단하고 어리석은 질문이다.

정간은 어떤 건물의 중심이 되는 한 가운데의 간(間)이며 그 건물의 어떤 공간보다도 상위의 공간이고 우리는 이곳을 존엄처(尊嚴處)라고 생각하였다.

언제부터 생겼느냐하면 인간이 윤리와 도덕적 개념에 눈을 뜰때 정간 사상이 이미 존재하였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정간이 무엇이냐 하면 한 건물의 한 가운데 중심에 있는 간(間)이다.

 

이 정간은  중심으로 좌간(左), 우간(右間)으로 나누어지고 동서간(東西間)남북간(南北間)으로 나누어져서 오행으로 설명하면 전간은 한가운데의 중심 토(土)이고 동간은 목(木)이요, 서간(西間)은 금(金)이고 남쪽의 간은 화(火)이고 북쪽의 간은 수(水)가 된다.

 

따라서 정간은 상위 공간, 중심공간이고 상좌(上座)이고 존엄처이다.

대궐에서 정간은 임금이 좌정하여 정사를 다스리는 곳이므로 이곳은 정간이라 하지 않고 어간(御間)이라고 하며 대궐의 문은 삼간병문(三間屛門)으로 가운데의 정간의 문은 어가(御駕)만이 드나들 수 있고 일반 신료는 좌우 측간 문으로 다녀야 한다.

민간의 예를 들면 일반사가에서는 조상의 혼령을 모시는 사당이 있다.

 

이 사당의 정간에는 조상의 신위를 모시는 존엄처 이고 사당의 출입문도 삼간병문으로 사당을 드나들때는 좌측간으로 사당에 들어가고 나올때는 우측간으로 나온다.

정간의 존엄처로서 신도( 神道)하여 조상 신 만이 드나 들수 있고 아무도 정간문으로 통행하여서는 안 된다.

 

사가(私家)의 건물에도 정간에는 상좌라 하여 반드시 웃어른이 좌정한다.

이와 같은 정간은 복잡한 수식과 설명이 필요 없는 그 건물의 중심이 되는 간(間)이고 그 간은 항상 상위(上位)의 개념이요 존엄처인것이다.

따라서 사정의 정간에는 선생안(先생案:전임관원의 이름 직명 생년월일 본적 등을 적은 책)을 모시기도 하고 작고한 전임 사두님들의 위패를 모시기도 하며 그 앞에 정을 대표하는 정의 대표가 않는 자리가 마련되며 사원들이 등정 할때 고개 숙여 예를 올리며 날을 정하여 일년에 한 차례씩 제사를 올리기도 하며 신성한 존엄처로서 함부로 다루는 일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 정간사상은 활터 뿐만 아니라 우리 생활의 깊은 곳 까지 뿌리가 내려진 생활의 일부분이었고 당연하고 일상적인 생활이었다. 옛 문헌들이 특별히 정간에 대하여 기록하지 않았던 것은 이와 같은 연유에서가 아닌가 생각된다. 특히 황학정에도 엄연히 정간이 있었고 정간배례를 하였음에도 그 곳에서 저술과 편집이 이루어진 조선의 궁술(1929년刊)에도 정간에 관한 언급이 없었던 것은 이와 같은 연유임이 틀림이 없다.

 

문헌상으로 기록이 남아 있는 것은 전주의 천양정(穿楊亭)의 규례이고 , 둘째는 황학정(黃鶴亭)의 정간에 모신 황제의 어진(御眞)이고, 증언으로 취록한것은 통영의 남송정(南松亭), 울산의 만하정(挽河亭)이다.

 

1. 전주 천양정(全州 穿楊亭)

천양정은 1912년 인근의 군자정, 읍양정, 다가정이 통합하여 창림된 정으로 정의 이름을 천양정이라 하고 규례(規禮)를 제정하였다.

그 규례는 지금도 보존되어 있는데 여기에 보면 정간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 규례 : 7. 사규(射規)는 의습(義習)을 정돈하고 순서를 준수하여 경약부박(輕躍浮薄)의 행동을 불허(不許)함으로 좌의 조항을 부함.

            1항. 사원이 사정에 진(進)할 시는 필선(必先)정간(正間)배례 한 후 사반(射班)에 입(立)함.

  

이후 천양정 규례는 1958년 사장(射長) 김희순(金熙舜)외 수명이 기초위원이 되어 헌장(憲章)으로 개정하였는데 여기에 보면,

           제 25조: 정간은 선생안 또는 사장의 정좌를 상징하는 존엄처이므로 정간또는 정간의 정면은  타인의 침범을 불허한다.

           제 26조 : 사원은 등정 즉시 정간에 경민한 태도로 배례하여야 한다.

이후 천양정은 1990년 6월 6일 헌장을 정관(定款)으로 개정하였는데 제 45조에 정간의 존엄성을 기술하였으며 제 46조에는 정간 배례를 기술하고 있다.

 

 

2. 서울 황학정(黃鶴亭)

모두들 황학정에는 정간이 없었다고 한다.

심지어 황학정을 대표하는 사람들 조차 황학정에는 정간이 없었다고 한다.

어떻게 황학정에 정간이 없었다고 할 수 있는지 반문하고 싶다.

황학정은 1922년 옛 등과정(登科亭) 건물을 옮겨와 18평 정도의 정사를 건립하였고

 

그곳에는 엄연히 정간이 있었다. 다만 정간을 이해 못한데서 비롯된 오해일 뿐이다.

황학정에서는 정간에 황제의 어진을 모시고 정간배례를 하였다. 어떤 분들은 황제의 어진에 배례하였지 정간배례는 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이는 몰라도 한참 모르는 말이다.

 

황학정에는 정간에다 황제의 어진을 모신것이지 황제의 어진에다 정간을 모신것이 아니다.

전주 천양정에서 정간에다 선생안을 모시고 배례한 것이나 황학정에서 정간에 황제의 어진을 모시고 배례한것이나 무엇이 다른가 그런데도 어떻게 황학정에서는 정간 배례를 하지 않았다고 하는가 이것이 모두 정간이 무엇인지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데서 일어난 넌센스다.

 

 

다시한번 강조하지만 정간이란 사정의 중심이 되는 공간이요 우리는 이곳을 정간이라 하며 신성시하며 존엄처로 생각하며 함부로 다루지 않는다. 사가에서도 우리의 선현들이 정간인 대청마루에서는 걸터 앉지 않던 생활의 습관들이 이곳을 신성하고 존엄스러운 곳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단 툇마루에서는 걸터 앉아도 허물이 되지 않았다. 이와 같은 이유 때문이다.

 

정간이란, 정간이라 새긴 현판이 아니며 혹시 정간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고 하더라도 그 현판은 이 곳이 정간처라는 표시이지 그 현판이 정간이 될 수 없는것이다.

결론적으로 다시한번 말하거니와 황학정에서도 정간배례를 하였다.

 

 

3. 통영 남송정(統營 南松亭)

 - 김 행윤(金幸潤)공의 증언(향년 100세로 작고함)

공은 서기 1900년 생이시다.

28세때 통영의 남송정에서 집궁하여 만 70년간 활을 쏘신 원로이시다.

남송정은 1753년 통영에 조선 수군통제사로 부임한 구혁연(具赫然)공이 현재의 남망산 공원 기슭에 활터를 만들어 수군과 한량(閑良)들에게 궁술을 연마하는 도장으로 삼은 곳으로 그 규범이 엄격하였다고 한다.

 

한말의 혼란기와 왜정의 암흑기에도 우여곡절은 있었으나 그래도 정은 운영되고있었다고 하며, 김행윤 공은 금융조합(현 농협의 전신)직원이었다. 김행윤공이 집궁한 해가 1928년 이었는데 그때 사정에서는 반드시 정간배례를 하였다고 한다. 그때 왜경들이 신사(神社)에만 참배하고 정간배례를 못하게 하였는데 남송정 사원들은 신사는 신사이고 정간은 정간이라고 하면서 정간배례를 계속하였다고 증언하였다.

 

당시 정간에는 선생안을 봉안하였다고 하였다.

필자는 김행윤 선생과 면담할 때 연세가 98세 였기 때문에 혹시 착각하고 있는지 의심스러워 다시금 질문을 하여 보았으나 여전히 왜경들과 정간문제로 다투었던 이야기를 하면서 정간배례를 계속 하였다고 하는데 연치가 98세까지도 그 기억력이 변함이 없음을 확인하고 선생의 건강에 놀라워 했다.

 

 

4. 울산 만하정(蔚山 挽河亭)

옛날 울산 지방에서는 한량들이 궁술회를 조직하여 태화 강변등지에서 과녁을 세워놓고 활을 쏘았는데 1920년경 회원중에서 독지가가  활터의 대지를 제공하고 회원들이 정성을 모아 정사를 건립하여 그 이름을 만하정이라 하였다.

 

정사의 정간에는 선생안을 모시고 역대로 궁술회를 이끌던 작고한 대표님들의 위폐도 봉안하고 매년 날을 택하여 제사를 봉행하는 등 그 규범이 엄격하였으며 정간배례는 등정할때나 퇴정할 때 반드시 정간배례를 하였다고 한다.

만하정은 활터의 대지 문제로 분쟁이 야기되어 재판까지 하는 등 문제가 해결되지않아 폐정되었는데 아직도 결말이 나지 않아 정사에는 선생안과 위패들이 그냥 남아 있다고 한다.

 

* 만하정 자료는 전 울산지부장이었던 김두희씨가 제공해 주셨다.

 

 

三. 현판과 정간배례

옛날 부터 정간이라는 현판을 걸어 놓고 정간배례를 하였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았던것 같다.전주의 천양정에서는 현판을 걸어 놓고 정간배례를 한것이 아니라 정간에다 선생안을 모셔 놓았으며 서울의 황학정에서는 고종황제(高宗黃帝)의 어진을 정간에다 모셔놓고 배례를 하였다고 하며, 천양정에서는 1990년대 한때 정간 현판을 걸었으나 지금은 현판은 없지만 정간배례는 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의 전국 각 사정에는 거의 전부 정간이라고 새긴 현판 또는 액자를 걸어놓고 정간배례를 하고 있다. 아마 1920년대 이전에는 정간이라는 현판이 보편화 되지 않았던것 같다.

 

사정에서 궁사들이 정간을 향하여 절을 하려고하니 정간에는 허공일뿐 아무것도 없으니 무엇인가 허전함을느껴 결국은 정간이라는 현판을 걸게 된것 같은데, 그렇다고 해서 그 현판이 정간이 아니라 정사의 한가운데의 간이 정간인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정간에 배례하는것은 정사의 한 가운데의 간을 보고 배례를 하는것이다.

이곳을 우리는 존엄처라 하여 선생안도 봉안하고 어려운 역경에도 우리 전통 궁술의 보존 및 발전을 위하여 노력하다 먼저 가신 선현들의 위패를 모시고 경건한 마음으로 배례를 하는것이지 결코 정간이라고 새긴 현판을 보고 배례를 하는것은 아니다. 

정간이라고 새긴 현판은 다만 이곳이 이 정사의 정간이라는 표시이지 정간이라 새긴 현판이 정간은 아닌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간이라는 현판을 철거 해야 한다는 등 온갖 망언과 망발 등이 일어나고 있는데 현판을 철거한다고 하여 정간이 없어지는것도 아니며,  그사정의 정간 개념이 없어지는것도 아니다.

 

 

四. 맺는말

그럼 앞으로 정간배례를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가 문제인데 정간의 의미는 이미 앞서 논했기 때문에 다시 재언을 않지만 정간은 이미 우리들의 일상생활에서 존엄처요, 한 건물의 중심처요, 상위개념인 제일 윗자리라는것을 부정할 수가 없을 진데, 어찌 이곳을 존경하고 신성시 하는 것을 나무라겠는가 ,

 

다만 현판 또는 액자를 걸어 놓고 그 곳을 보고 절을 하는것은 우리들이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가 아닌가 생각된다.

이 문제는 어떤 기회에 공론에 붙여 한번 논의를 해 보았으면 좋겠으나 정간에 대한 이론은 있을수 없는 일이다.

 

따라서 현재의 정간 배례는 우리들의 미풍양속(美風良俗)으로 권장할만한 사항이며 수 많은 역경에도 불구하고 올바른 궁도의 계승 발전을 위하여 몸 바쳐 노력한 선현들에 대한 경배(敬拜)로서 우리들은 이를 통하여 선현들이 남기신 건전한 사풍을 지켜서 자손만대에 전해주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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